코신제례
Ritual en honor a la Diosa Coca-Cola
지민석展 / CHIMINSEOK / 池珉錫 / painting.installation
챔버
2024_1023 ▶ 2024_1111
코신제례의 합리성과 주체적 미래 상상
“픽션을 일상적 경험과 구별하는 것은 결여된 현실성이 아니라 과도한 합리성이다.”
한국 전통 샤머니즘 및 종교의 맥락에서 코카콜라 여신의 탄생이라니, 허구도 이런 기막힌 허구가 없다. 지민석은 현대 소비문화를 상징하는 108개의 브랜드를 한국의 전통 신으로 형상화해왔다. 각 신을 의미하는 새로운 문자를 창제하고, 각 신들은 자신의 메타포를 품은 채 사물의 상태에 대한 묘사를 그것의 가시성의 형태들을 결정하는 상징적 지형에 새기는 방식으로 표현되었다. 특히 이렇게 지어진 신들 중 코카콜라 여신은 신화를 넘어 종교를 만들고, 구체화된 코신제례를 형식 안에서 ‘중재’라는 공동체의 철학을 나열하게 된다. 이렇게 지민석은 코카콜라와 한국 샤머니즘이라는 이질적 행위자들을 솎아 내고, 그들이 속한 가정적 정황(사건)을 단정하고, 이질성의 공존과 연속을 가늠하며, 유효성과 대안성의 양상을 식별하게 하는 굿판을 펼친다. 그리고 시각 예술 안에서 지각 가능하고 사유 가능한 형태로 우리를 초대한다.
지민석의 이질적 행위자들이란, 성스러움의 필연에 따라 상업적이고 세속적인 것임과 동시에 상업적이고 세속적인 것의 저편에서 여전히 성스러운 것, 그리고 그들의 가장자리에 위치한 차이를 지우는 지난한 과정이며, 이는 작가에게 주요한 중재의 가치에서 비롯된다. 지민석의 허구적 세계, <코신제례>는 신화의 맥락 안에서 쉬이 읽히는 결여된 현실성을 드러내는 것이 아닌 우리가 지각하는 세계에 대한 과도한 합리성을 엿볼 수 있는 장이다. 나는 허구의 코카콜라 여신 신화를 통해 실재를 기록하기 위한 역사의 가장자리 내외부를 짚어가며, 코카콜라 신화의 대안적 미래주의 상상력이 취하는 의미와 형태들을 따져본다.
코카콜라 여신은 한없이 커져버린 태양, 세상이 불타고 모두가 눈을 뜨지 못하는 때 숯에서 탄생한다. 코카콜라 여신은 눈을 뜨지 못하는 이들에게 검은 그림자를 내어주고, 인간은 만물을 바라보아 길을 알게 된다. 태양과 대적하는 코라콜라 여신이 태양의 속성과 같은 숯에서 탄생한다는 점은 여타 신화에서 많이 등장하는 ‘일체화 현상’과 연관된다. 일체화 현상은 신화 속 인물이 대적하는 대상과 같은 속성이나 형상을 가지는 현상이다. 그리스 신화의 아테나는 괴물 메두사의 잘린 머리를 방패에 달고 다녔다는 이야기, 인도 신화 『마하바라타』 속 영웅 ‘아르주나’의 숙적 ‘카르나’는 한 어머니에게서 태어났으며, 둘 모두 활 솜씨가 뛰어났다는 점, 심지어 해리 포터 시리즈에서 주인공 해리 포터는 숙적 관계인 어둠의 마왕 볼드모트와 영혼이 연결되고, 둘 모두 뱀과 대화할 수 있다는 것이 있다. 이는 대적하는 존재, 미움의 존재를 계속해서 바라보게 되는 모순이 인간의 무의식 속에 오래도록 자리 잡아 왔다는 것을 보여주는 신화의 합리성이다.
코카콜라 여신 신화에서는 신화학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숫자 3의 해석이 발견되기도 한다. 프랑스 문헌학자 조르주 뒤메질(Georges Dumézil)이 세운 ‘3기능 체계설’에 따르면 3기능 체계란 “계층화된 세 개의 기능이 세계를 성립하고 유지한다고 보는 시각”이다. 계층화된 세 개의 기능은 마술적 힘, 세계 지배 권력을 의미하는 ‘신성’과 물리적 힘, 전쟁의 승리를 의미하는 ‘전투력’, 물질적 부, 미와 사랑을 의미하는 ‘풍요’로 구성된다. 코카콜라 여신 신화에서 발견되는 3가지 주요 소재, ‘숯’, ‘호리병’, ‘다리 달린 청어’ 3개의 요소는 3기능 체계를 따르고 있다. 코카콜라 여신이 탄생한 숯의 이중성은 신성을 의미한다. 또한 태양에 저항하는 어두운 기운이 담긴 호리병은 전투력을 의미한다. 그리고 늘 코카콜라 여신 곁을 지키는 다리 달린 청어는 물과 땅을 오가는 존재로 숯과 같이 신성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어마어마한 개체 수로 인간의 주요 먹거리로 사용되어왔듯 풍요를 의미한다.
숯은 태양과 같이 빛과 열기를 내재한 존재임과 동시에 차가운 물성을 지니고 있는 이중성을 갖는다. 숯의 이중성은 뜨거운 것과 차가운 것을 매개하고 중재하는 것으로 신계와 인간계의 연결과 중재, 양과 음, 빛과 어둠의 중재를 뜻한다. 특히 숯에서 태어난 코카콜라 여신이 사람들이 던진 돌에 맞아 한쪽 다리를 못 쓰는 불구가 되었다는 점 역시 신화학에서 중재를 의미하는 요소로 발 하나 없는 이미지가 사용된다는 점과 연결된다. 이러한 중재의 요소는 다양한 픽션에서 등장한다. 어린 시절 읽었던 신데렐라는 아궁이 속 잿더미를 치우는 여자였고, 해리 포터에서는 폴리가루를 사용하거나 화장실의 변기를 통해 마법부의 아궁이로 도착할 수 있었다.
사람들에게 자신의 서늘한 기운을 내어주던 코카콜라 여신은 점점 더 뜨거워지는 태양을 막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며 하늘로 올라가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호리병 속 어두운 기운을 하늘에 뿌린다. 코카콜라 여신과 대적하던 태양과 장군신은 새로운 중재를 맞이하고, 하루 한 번씩 하늘에 떠 있게 된다. 사람들은 하루 한 번 찾아오는 어두운 하늘을 보고 “봐!”라고 외쳤고 이렇게 밤이 탄생한다. 이는 언어적 유감주술의 형식을 띄고 있다. ‘보다’는 ‘알다’이다. 익히 알려져 있듯 영어의 ‘see’가 그러하고, 프랑스어에서 ‘지식을 의미하는 단어 ’savoir’는 ‘voir(보다)-‘avoir(소유하다)-‘savoir(알다, 지식)의 어근을 갖는다. 보는 것은 소유하는 것이고 알게 되는 것이며 지식은 소유한 것, 권력이 된다. 신화 속 인류는 밤을 보고, 밤을 소유하고, 밤을 알게 되는 주체성을 회복한다. 지민석의 세계는 단일한 하나가 아니다. 그에게 세계는 다수결의 원칙에 의해 결정된 듯한 가치, 혹은 자본과 권력이라는 거대 주체에 의해 규정된 하나의 세계가 아니다. 지민석이 바라본 세계는 극단적 호불호 가치 편향과 자본주의에 의한 가치 전도, 망각, 소외의 세상이다. 그렇기에 중재의 가치를 품고 세계를 주체적으로 이해하길 요청한다. 그의 신화에 중재를 통한 주체성 회복이 주요하고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이유이다.
거대한 태양은 삶의 필수적 요소이자 절대적 권력을 상징한다. 코카콜라 여신 신화 속 끊임없이 커져가는 태양은 인류의 삶을 불행으로 이끄는 조건이 된다. 계속해서 거대해지는 태양은 절대적이고 자기 완결적인 서구 형이상학, 잡념 없이 맑고 깨끗한 의식 상태에 대한 열망의 상징이 된다. 거대한 태양에 저항하는 코카콜라는 거대 주체, 서구적 사유, 자본주의를 품은 이중성을 지닌다. 자본주의의 상징인 코카콜라는 지민석에 의해 한국의 샤머니즘 안으로 포섭되고 활용된다. 이로써 지민석은 신비롭고 놀라운 동양 작은 나라 한국의 문화에 대한 막연한 관심, 그리고 그 문화권의 문제를 해결하는 서구의 주체 상정이라는 서구의 보편적 한국 문화 활용을 전복시킨다. 지민석은 “예술은 우리를 둘러싼 진지한 놀이를 허물 수 있는 새로운 놀이”라고 말한다. 지민석은 모순적이고 이질적인 개념들을 하나로 엮어 대립과 반대항의 조건을 허무는 허구 짓기 놀이의 주인이 된다. 자신을 둘러싼 경제, 문화 시스템에 대한 거대한 개념들을 자신의 해석 안에서 전면적으로 활용하며 해석하는 것. 한국의 전통을 바라보는 거대 주체의 시선, 그것을 탈피하는 것. 즉, 자신의 전통문화 속으로 코카콜라를 편입시키는 태도. 이것이 거대해지는 태양 앞에서 시원한 콜라 한 잔을 들이켜고, 남은 호리병 모양의 콜라병에 주목하는 작가의 유쾌하지만 진지한 방식이다. 이렇게 지민석은 진짜 우리의 삶이 무엇이며,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자문한다. 자기 성찰적 자문으로 태동한 그의 대안적 상상은 동서양의 혼합된 문화권을 살고 있는 자신에 대한 주체적 창작이다.
글_임휘재(독립 큐레이터, 미술 비평)
다대팔경과 문자들
Landscape of eight views of Dadaepo and Their Characters
Paisaje de las Ocho Vistas de Dadaepo y sus Caracteres
홍티아트센터
지민석展 / CHIMINSEOK / 池珉錫 / painting.installation
2024_1016 ▶ 2024_1030 /
문화적 習合의 진경과 문자-그림의 새로운 기호, <다대팔경과 문자들>
지민석 작가의 <다대팔경과 문자들> 전시는 홍티아트센터 레지던시 3개월만의 성과라고 하기에는 굉장한 속도와 다작이 느껴진다. 이미 작가 자신의 체득된 세계가 다대포 일대의 자연 환경과 역사 및 전설의 내력 속으로 침투해들어갔기에 가능한 작업이다. 일단 작가는 샤머니즘의 요체를 포스트-페티시즘의 세계로 수렴하고 있다. 어떤 무신도라든가 어떤 무구라든가 또한 어떤 부적이나 문자도라든가 하는 일체의 기존 샤머니즘 코드에 대하여 작가는 그 코드 본래의 진하게 문화화되어 있는 인장 印章 효과랄까, 혹은 신인 神印 효과랄까 하는 일종의 페티시한 성격을 새롭게 재문화화시킨다. 인장 효과 혹은 신인 효과라는 것은 본래 샤머니즘이 노리는 주술적 결과이다. 페티시는 그 주술을 현실화하기 위하여 샤머니즘이 사용하는 여러 가지 물신주의적 접근이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물신주의라는 것은 자본주의의 상품 교환에서 일어나는 화폐의 물신으로서 타파되어야 할 중요한 미신이다. 이 미신은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경제동물의 종교와 다름없는데, 이것을 종교로 보냐 이데올로기로 보냐에 따라 화폐-페티시를 파괴할 수 있는지 여부가 결정된다. 사실 지금까지 마르크스는 이데올로기로 보고 화폐에 대한 물신숭배 풍조에서 건져낼 수 있다는 생각을 가졌다. 하지만 언데드 상태에서 지속하고 있는 자본주의는 화폐-페티시를 떨쳐버리지 못한 채, 지금까지 굴러가고 있다. 죽었지만 작동한다는 의미에서 이 페티시즘은 분명히 냉소적이며 믿지 않으면서 그 속물적 효과에 종속되어 있다.
지민석 작가의 다대포 일대의 풍경들을 자신이 마치 그 옛날 한자를 발명한 위대한 창제자 창힐 蒼頡처럼 문자도라는 얼개 속에 감아들이는 것은 소위 다대팔경이라는 그 동리의 절경들에 대한 상징적 산수화를 그리는 것이 아니다. 그는 그 풍경 속에 깃든 텃대감, 지박령, 토호신들의 끈적끈적하면서도 단단한 세계를 녹여서 자신의 문자도 속에서 재문화화하려고 시도한다. 이 재문화화란 기존의 텃세 체계 속에서 기득권화되고 현상유지화된 영역들을 문화의 새로운 도장을 찍어서 신인 神印적인 새로운 영역으로 이동시키려는 것이다. <화엄경>에서 이러한 신인적인 새로운 영역으로 가는 수행을 ‘해인삼매 海印三昧’라고 하는데, 출렁거리는 바다의 파도 하나하나마다 생명의 도장을 찍는 삼매경에 들 수 있다는 뜻이다.
일종의 해인삼매를 위한 밑밥으로 지민석 작가가 여러 무신도 배치라든가 코카콜라 신령의 창안이라든가 하는 작업들이 샤머니즘 코드로서 익숙한가 하면, 사실은 그 익숙함 속에서 삼매에 빠져드는 유인책이 깃들어 있다. 풍경 + 문자도 라는 얼개는 풍경을 물신화하는 상징적 단위로 만드는 것이다. 부적이라든가 하는 개인적 안심인명의 도구처럼 만들어졌는데, 굿으로 말하면 “부자들 더 부자 되게 해주는” 재수굿 혹은 “땅에 붙박혀서 터주대감으로 쪼그라든 것을 펴서 본래의 하늘 대감으로 되돌아가게 해주는” 대감굿을 위한 플랫폼이다. 지민석 작가의 의도는 단순히 다대포 일대의 명승고적들을 둘러보고 그에 합당한 기념비적인 그림이라든가 샤머니즘적 재현이라든가 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화폐-페티시에 대항할 만한 새로운 방편으로서의 페티시, 그럼으로써 페티시를 넘어서는 페티시로서의 포스트-페티시즘을 선양하는 시도를 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어떤 대감이 내 대감이냐, 어떤 대감이 내 대감!
욕심도 많고 탐심도 많은 내 대감 아니던가
앞다리 선각에 뒷다리 후각 양지머리 걸안주는 엇다두고
이게 무어냐, 이걸 차렸다고 차렸느냐”
<대감타령> 중에서 페티시즘은 처음에 식탐으로 시작하여 나중에는 돈보따리 내놓으라는 윽박으로 이어진다. 이때 기브앤테이크의 교환거래를 하기 위한 협상을 하지 않고 사람들은 못 살고 못 먹고 못 입으며 질곡에 빠져 있음을 호소한다. 이때 대감신은 마음을 고쳐먹고 “작은 정성을 큰 정성으로 알고 내가 복도 빌어주고 명도 주마” 라고 회심한다. 화폐-페티시 앞에서 대감신은 재수와 복을 내놓으라는 부자들의 뻔한 개수작을 스스로 터주대감의 굴레로부터 벗어나 하늘 대감의 무한히 베푸는 권능으로의 귀환으로 응수한다. 그럼으로써 지역 토호들, 안 베푸는 자린고비 구두쇠들, 텃세로 똘똘 뭉친 터주대감 유지들이 회심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한다.
“돈이 필요하느냐, 그럼 나에게 베풀어라. 나에게 천만금을 줘라, 그럼 억만금으로 베푸마” 이런 대감타령은 돈타령이다. 이 돈타령하는 기저에 깔린 화폐-페티시는 그 성격이 정반대로 돌변한다. 무한히 쏟아지는 금화의 빗속에서 부자가 개과천선하는 것, 영화 <이반 대제>에서 끝없이 푸대자루 속으로 들어가는 금화로 탐욕의 침을 흘리는 것 이렇게 두 갈래가 화폐-페티시의 잠재성 속에 한꺼번에 깃들어 있다.
지민석 작가는 이러한 양가적인 화폐-페티시를 탈코드화시키듯이 자신의 문자-그림을 그려간다. 사람이 질릴 정도의 풍요와 질릴 정도의 번영과 질릴 정도의 평화를 누리면 그후에야 비로소 그러한 페티시 지향에서 자유로워진다는 샤머니즘의 숨겨진 면모가 그림 속에 한가득이다. 그러한 무량한 베품과 무량한 재복이 그 문자-그림의 기호 속에 어떻게 하여 담기는가 살펴보니, 작가는 태평양 양안 저편 멕시코 신화와 페요테 샤머니즘에 정통해 있다. 사막에서 선인장 神을 만나도 그대로 지나쳤다가 그 뒤에서 선인장을 채취한다는 <돈후앙의 가르침>의 교훈은 페요테가 아무리 필요해도 선인장 神의 앞전이 아니라 뒷전에서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지민석 작가의 전시장 공간 허공을 고공침투하듯이 가르는 영험스런 연출은 태평양 양안의 문화 즉 한국의 샤머니즘과 멕시코 신화 사이의 보이지 않는 터치들이 함께 하고 있다고 하겠다. 양안의 두 문화가 습합된 부분을 주목해보는 것이 긴요하다. 또한 작가는 인생에 파도가 커야 그 매머드급 파도의 크기를 따라 성장한다고 하는데, 이 작가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상상초월의 파도를 타고 가는 풍운아적인 인생 스토리에서 이미 화폐-페티시를 뛰어넘는 재문화화의 기획, 기존의 문화적 코드를 플랫폼 삼아서 새로운 코테이션의 포스트-페티시즘이 가능하다는 것이 충분히 납득된다.
요컨대, “물신으로 물신을 넘어선다”라는 매우 위험하기 짝이 없으면서도 태평양 양안의 문화에서 특출나게 발견되는 명제가 지민석 작가의 작업 세계를 꿰뚫고 있으며, 특히 다대팔경처럼 관광지의 통속화된 랜드스케이프를 갖다가 텃대감, 지박령, 토호신들이 시기 질투하는 영역을 뛰어넘어 해인삼매에 들게 한다는 것이 매우 고무적이다. 이런 방식으로 숭고미를 추구한다는 것은 포스트-페티시즘이 한국 사회에 샤머니즘 코드를 타고 지향되는 것은 사실 많지만, 지민석 작가의 경우가 시대를 통할지는 좀더 지켜봐야 할 대목이다. 코카콜라, 치토스처럼 멕시코에서 크게 유행한다고 하나 지난 30년 동안 글로벌 유행이었던 작은 역사도 있는 반면, 캠벨 주스 같은 미술사 내부에서 나온 상품 물신도 있었기 때문에 한국의 내부 맥락과는 다소 갭차이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멕시코 옥수수 여신과 담배 여신 그리고 날개달린 우주뱀의 신 케찰코아틀 같은 세계가 한국의 전형적인 동해안 별신굿 문화라든가 다대포 풍경 속에 깃든 애미니즘적 문화라든가 등등 낯선 세계와 거의 치명적으로 습합되는 작업은 지민석 작가가 유일할 것 같으며, 이는 멕시코의 애니깽이라든가 마야 문명 아즈텍 문명 등등 대상화되거나 소재화된 형태의 작업과는 그 수준을 달리하는 것이다. 앞으로 태평양이라는 물신명이 양안의 문화적 습합, 샤머니즘의 포스트-페티시즘적 재문화화 작업 속에 나타나기를 앙망하며 건투를 빈다.
김남수 (미술비평)
알고보면 반할 세계
경기도 미술관
지민석 外 展 / CHIMINSEOK / 池珉錫 / painting.installation
2024_1115 ▶ 2025_0223
●지민석>>
지민석은 동양철학을 연구하는 예술가이다. 샤머니즘이 과거에 돌, 나무, 산 등 우리 주변의 것들을 통해 인간 세계와 신들의 세계를 잇는 것이었다면, 작가는 지금 우리를 초월적 세계로 이끄는 현대적 샤먼이 무엇인가에 대해 사유한다. 도시의 삶 가까이에 있는 다국적 기업의 상표 이미지들은 작가의 작품에서 인격화된 신으로 등장해 신화적 서사를 만들어낸다.
전시된 신 그림들은 만물의 근원에 대해 성찰해 가는 작가의 탐구 중 ‘백팔신중도(百八神衆道)’*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그려진 그림들이다. 인격화된 각 신들은 한국 전통 샤머니즘과 현대 상표 이미지가 결합된 도상으로, 작가가 직접 만들어낸 상표별 상형문자의 문자도(文字圖)*와 대응된다. <오문자도(코, 스, 구, 캠, 치)>(五文字圖, 2024)는 작가가 장수와 복을 기원하는 백수백복도(百壽百福圖)*의 양식을 빌어온 것으로, 현대인에게 무릉도원의 상징과 같은 상표 문자의 종합체이다. 작가는 예술을 샤머니즘적 관점에서 창작하며 그의 성찰을 매개하도록 한다. 신중도(神衆道)*와 문자도, 백수백복도를 현대적으로 번안한 작가의 작품은 지금의 사회와 우주관을 돌아보도록 이끈다.
* 이 글에서 ‘백팔신중도(百八神衆道)’는 108위의 신을 그린 작가의 프로젝트를 일컫는다.
* 신중도(神衆道)는 여러 신들의 형상을 그린 것이다.
* 문자도(文字圖)는 유교의 도덕적 지침으로서 효(孝), 제(俤), 충(忠), 신(信), 예(禮), 의(義), 염(廉), 치(恥)의 문자를 도상과 함께 그린 그림으로, 문자에 따라 효도와 의리, 믿음, 예절 등의 뜻을 담고 있다.
* 백수백복도(百壽百福圖)는 오래 산다는 의미의 수(壽)와 복될 복(福)자 등의 기복을 담아 문자를 그려 넣은 그림이다.
방초아 (경기도미술관 큐레이터)
자본주의 세계의 종말을 위한 새로운 신들
Nuevos dioses para un fin del mundo capitalista
(New Gods for the End of a Capitalist World)
갤러리 유니언
지민석展 / CHIMINSEOK / 池珉錫 / painting.installation
2024_0517 ▶ 2024_0706 /
본 전시는 프로젝트 《백팔신중도》(2020년부터 현재)의 일부 작품을 선보인다. 프로젝트는 한국의 청년 작가 지민석(서울, 1990)이 진행하고 있는 장기 프로젝트이다. 몇 년 전부터 멕시코 이달고(Hidlago)주에 거주하며 작업 중인 작가는 한국 전통 종교 미술의 형식을 차용하여 전통과 현대를 오가는 활발한 창작 활동을 펼치고 있다. 특히, 작가는 불교 미술의 도상 및 형식을 많이 사용한다. 불교는 4세기부터 10세기까지 한반도의 공식 종교였고, 이 시기는 불교의 종교적이고 철학적인 사상이 확산되며 지역 예술이 발전한 황금기였다. 조선 왕조(1392-1910) 동안 유교가 강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불교 문화의 영향력은 계속 지속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불교적 도상의 재해석은 작가의 창작 활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장기 부처》(2014-2016) 시리즈에서 지민석은 인간의 다양한 장기의 해부학적 표현을 사용하여 부처, 천신, 기타 신들의 표현을 재구성하였다. 작품에서 각 신의 형태 속에는 심장, 폐, 장기 같은 신체의 조직이 기존의 불교 미술 도상과 조화를 이루며 새로운 구성을 만들어 낸다. 작가는 신성한 부처의 형태와 인간의 신체 장기를 결합하여 형태의 경계를 허물고, 이를 통해 모두가 같은 본질을 공유한다는 철학을 시각적으로 표현한다. 이러한 재해석과 표현은 신성과 도상의 파괴처럼 보일 수 있는데, 이는 상징적으로 작가만의 종교적 세계를 현대적으로 갱신하기 위한 작업이다.
지민석은 《ARTE_MPLO》(2016-2018) 시리즈에서도 전통 종교의 철학적, 도상적 재해석과 경계 허물기를 계속했다. 다양한 불교 도상이 등장하는 이 시리즈에서, 그는 마땅히 부처가 있어야 할 자리에 버려진 물체를 배치하며, 세속적인 오브제들은 관람객 앞에서 신의 자리에 위치하게 된다. 이 오브제들은 단순히 쓰레기라고만 하기 어려운데, 작품에 부착된 코카콜라 병, 신발, 치약 튜브, 와인 병, 일회용 용기 등은 우리 일상 속에서 고도로 오염된 물체들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물체들을 종교적 도상 속으로 넣는 작가의 결정은 과연 우리가 스스로 속세에서 우주의 조화를 찾을 수 있는지 자문하도록 하며, 이를 통해 작품은 우리가 세상에 대한 깊은 호기심과 주의를 통해 편견 없는 인식을 다시 할 수 있도록 하는 잠재력을 다시 보게 해준다. 여기서 젊은 작가는 조형적 접근을 통하여 신성을 추구하는 노력과 현대 산업 폐기물의 축적을 유쾌하고 관대하게 연결한다.
다국적 기업, 브랜드, 그리고 그들의 제품들은 우리 일상 속 무소부재하여, 마치 성스러운 보호신으로 보이기도 하며, 동시에 악마와 같은 존재처럼 보이기도 한다. “만약 브랜드와 로고, 또는 그 제품들이 신으로 여겨진다면 어떨까?”, “그 신들은 종교적으로 어떻게 표현될 수 있을까?”, “그 신들은 어떤 모습을 가질까?”, 이러한 질문들이 지민석의 프로젝트 《백팔신중도》의 원동력이다. 지민석은 자본주의 속에서 신들의 전당을 만들기 위해, 자본주의 시대의 넓은 의미를 지닌 상징적 존재들에게 신체적 속성을 부여하여 인격신으로 만든다.
젊은 작가는 한국 불교의 유산을 자신만의 방법으로 받아들이며, 이는 그의 예술이 갖는 큰 장점 중 하나가 된다. 그의 작품 속에는 예부터 내려오는 한국의 종교 속 신들이 자본주의와 공존한다. 이러한 공존을 바탕으로 지민석은 작가가 창조한 각 신에 문자와 짧은 서사를 붙여서 그만의 새로운 신화를 형상화하며, 이는 자본주의 기업들이 자신의 상표상품을 위해 만든 자본주의 영웅적 서사와는 또다른, 작가만의 상징적 우주를 구축한다.
특히,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자신이 창조한 '코카콜라 여신'의 서사적 전개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이 새로운 신은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으며, 작가는 이 존재에 자신의 창작 신화를 부여한다. 새로운 신성은 다양한 도상적 레퍼토리를 갖추고 있으며, 여기에는 산수화 (조선 시대 예술에서 영적인 것의 최고 표현), 서예, 그리고 그녀의 탄생과 그와 관련된 신화를 포함한 서사가 포함된다.
우리는 예술가의 표현을 통해 자신의 세계를 만들어가는 신화적 서사의 발전과 확장을 목격할 수 있다. 이것은 스핀오프도, 시퀄도 아니다. 108 신들의 여정은 오히려 아시아 문화의 기초를 이루는 천 년의 역사가 예상치 못하게 지워진 이후 발생할 포스트 아포칼립스 이야기와 더 가까워 보인다. 하지만 이들은 도상을 통해 과거의 일부를 회복하고 새로운 전통, 새로운 의식, 새로운 영적 성찰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여기서 새로운 우주의 탄생을 위한, 작가에 의한 새로운 시작의 힘이 드러난다.
이르빙 도밍게즈
2024년 5월, 멕시코시티 이스타팔라파의 넥스틀리크팍에서
(스페인어-한글 번역 지민석)
백팔신중도 百八神衆道 The way of the 108 gods
지민석展 / CHIMINSEOK / 池珉錫 / painting
상업화랑
2023_0813 ▶ 2023_0902 /
지민석의 개인전 ≪백팔신중도≫는 신들의 초상화와 그들에 관한 서사, 그리고 그로부터 뻗어 나온 음악과 영상으로 이루어진 전시이다. 미술과 동양철학을 깊이 탐구해온 지민석 작가는 “백팔신중도 百八神衆道"라는 종교를, 하나의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냈다. 이 종교는 특이하게도 코카콜라, 에르메스, 유튜브, 미키마우스, 비자 등 보편적으로 사랑받는 글로벌 브랜드와 상품들이 신의 모습을 하고 있다. 작가가 직접 입거나 먹어본 것, 또는 눈으로 소비한 것들 중 108개를 선택하여 다시 관찰하고, 상상하여 신의 형상을 입혔다. 종교 “백팔신중도"는 그의 작업을 관통하는 주제인 ‘만물의 본질’에 다가가기 위한 생각의 통로다. 2020년부터 이어진 ‘신중도 프로젝트’의 그림과 글, 음악과 퍼포먼스는 하나의 종교적 세계관으로 수렴되었으며, 여기에는 작가의 동시대적 (자기)성찰이 담겨 있다.
앞서 말했듯 작가는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마주하는 것들을 신의 모습으로 그렸다. 초상화 연작 <백팔신중도>(2020~2023)는 작가가 직접 먹고, 마시고, 걸치고, 타고, 눈으로 소비한 것들에서 집단이 공유하는 가치(평판, 표준 등)를 떼어내 낯설게 관찰한 결과물이다. 거듭 바라보고 감각한 것들을 조합해 한 화면 안에 재구성했다. 이 초상화들은 동양의 종교화, 그중에서도 특히 부처나 보살의 모습을 족자에 담은 탱화(幀畵)를 닮아 있다. 108개라는 초상화의 수가 말해주듯 <백팔신중도>는 대상의 실재를 들여다보기 위한 작가의 자발적 수행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그 수행은 놀이처럼 유희적인 성격을 띤다. 2020년부터 지금까지 3번의 전시에 걸쳐 108점의 초상이 완성되는 사이, 각 도상에 관한 서사 또한 깊어졌다.
<백팔신중도경>(2023)에는 108개의 신 각각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이 경전은 도덕경이라는 동양 철학서를 해체하고, 108개의 관찰의 대상을 통로 삼아 재조합한 글이다. 작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전통적인 동양 철학에 “새 생명을 불어넣은” 것이다. 럭키참스 시리얼의(29)의 생김새를 훑어가며, 아마존(47)의 사업모델을 역설해 넘어뜨리며, 또 때로는 게토레이(2)의 목 넘김 감각을 되새기면서 동양의 철학 구절들과 연결 지었다. 자신이 살아온 시간의 한계 너머에서 온 말씀을 체화해서 현대 문명의 산물에 기대어 교리를 탄생시켰다. 이름과 개념은 허상일 뿐이라고 말하는 도덕경의 문장들을 여러 번 곱씹으며 읽어보았을 작가이지만, 일상생활에 깊숙이 침투한 익숙한 대상을 낯설게 보는 것은 퍽이나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본질을 찾아가는 동안 발견해낸 사회적 통념과 대상 사이의 간극, 그 틈새를 파고드는 방법론적 실험을 멈추지 않는다.
사회에서 얻은 인위적인 개념을 내려놓고 새로운 마음으로 바라보는 시도는 전통 종교무용의 형식으로도 이어졌다. 전시장 2층에 자리한 <백팔신중도무>(2023)는 백화점 곳곳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종교 의식 퍼포먼스를 담은 영상작업이다. 우리가 상품을 구입하고 문화생활을 하는 이 일상의 공간에서 무용가가 행복을 향한 몸의 언어를 펼친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최전선에서 행해지는 이 종교 의식은 언어와 움직임 사이의 미끄러짐, 대상과 무대의 부조화 등 복합적인 충돌이 전면에 드러내고 만다. 영상을 감도는 어색함과 낯섦은 실재와 관습적 사고 사이의 틈을 벌리는 열쇳말이 된다.
지민석은 초상화와 경전, 의식이 아우라(초월적 울림)를 이루는 ≪백팔신중도≫를 종교 ‘놀이’ 공간이라 부른다. 전시 기간 동안 상업화랑 을지로점은 108개의 신을 위한 ‘제단'이자 SF적 상상이 허용되는 관객의 ‘놀이 공간'이 된다. 지민석은 자신이 선행한 놀이의 결과물들로 공간을 가득 채우고 관객을 초대한다. 제례악처럼 차분히 흐르는 <백팔신중도악>(2023), 느리고 유연한 움직임의 <백팔신중도무>(2023)는 “백팔신중도"의 교리를 시각을 넘어 청각과 촉각의 영역으로까지 확장한다. 공간을 아우르는 선율,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이름 없는 이의 몸짓, 나부끼는 108신의 초상화가 한데 어우러져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된다.
전통 종교의 문법이 촉발하는 현재와 동떨어진 감각은 지금이라는 시간성마저 흔든다. 날짜와 시간 또한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개념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나면 우리는 과거, 현재, 미래의 개념을 초월해 생각할 수 있다. 작가의 동시대적인 성찰로 채워진 시공간은 오히려 보는 이에게 무시간성의 단서를 제공한다. 지민석은 일상에서 멀어진 시공간을 마련하여 초상화와 경전, 의식이라는 놀이법을 펼쳐두고 자유로운 관찰 놀이에 앞장선다. 한껏 분주한 서울의 중심부에서 펼쳐질 우리들(작가-관객)의 종교 놀이는 자발적이며 재미있고, 공정하며 감각적인 형식을 취한다.
≪백팔신중도≫에서 ‘도'는 ‘道(길 도)’를 쓴다. 이 전시는 작가가 제시하는 행복으로 향하는 여러 길 중 하나로서의 전시이다. 작가는 그가 깨우친 본질을 직접 발화하기보다는 낯선 표현과 소리들로 은유함으로써 그 길의 가능성만을 제시할 뿐이다.
“한번 숨을 내쉬니 현묘한 연기가 길게 뻗어 나간다. 연기는 이내 사라지지만, 한번 연기를 본 사람 속에서는 영원하다. 보이지 않는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니, 도가 이러하다.” -말보로(79)-
지민석이 제시하는 놀이는 일시적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연기와도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일상으로 되돌아간 관객이 만물을 자유로운 관찰의 대상으로 볼 수 있기를, 즐거운 놀이의 대상으로 두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익숙한 이름(코카콜라, 스타벅스, 샤넬 등)에 기대어 근원적 물음을 던진다.
최고은(독립기획자)
신중도 神衆道 The way of the gods
지민석展 / CHIMINSEOK / 地珉錫 / painting
삼각산아트랩
2022_1004 ▶ 2022_1014 /
타인과의 만남이 일으키는 변화 "번역(飜譯)"
먼 옛날, 인간은 이 세상의 비밀을 풀기 위해 신적인 존재와 대화를 시작했다. 이는 동서를 불문하고 궁극적 실체를 찾으려고 하는 사람들의 보편적 심리에서 시작된 무속적 감정이다. 그러나 이 보편적 심리에서 도출된 결과는 각각 형식을 달리한다. 어떤 지역에서는 기독교, 어떤 지역에서는 불교, 어떤 지역에서는 각종 민간종교가 다양한 형식으로 나타났다. 이렇게 보편적 심리에서 각 문화의 차이가 생기기 시작한다.
지민석 작가는 "무속적 감정"이라는 인류 보편의 심리에 바탕을 두며, 어느 문화가 자기와 다른 특성을 가진 문화와 만났을 때 "번역(飜譯)"이라는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을 서로 다른 문화의 융합을 통해 나타내고 있다. "번역"은 타인과의 접촉이 잠재되어 있는 개념이다. 타인과 만나지 않는다면 "번역"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일단 타인과 만나게 되면 사람은 좋든 싫든 자기와는 다른 타인의 사고를 "번역"하여 대화를 하며, 그 순간 자기의 사고에도 변화가 생긴다.
이렇게 해서 양자는 사고의 교환을 통해 점점 대화의 지평을 넓혀 타인이 이해할 수 없는 특수성에서 타인이 모두 이해할 수 있는 보편의 세계에 나아가게 된다. 부처, 예수, 알라라는 고유명사를 넘어 "신"이라는 번역을 이루면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보편개념의 길이 열린다. 즉, "번역"은 인간이 서로 이해하는 경지인 보편의 세계에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이러한 "번역"의 관점에서 지민석 작가의 전시를 분석해 보면 기존 동양화의 모방이라고 보일 수 있는 그림에 서양 브랜드의 요소가 자연스럽게 녹아 들어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서로 간의 만남이 없었다면 이 그림들은 탄생할 수가 없다. 오로지 만남 후의 "번역"이라는 과정을 거쳐야만 이러한 자연스러운 융합이 가능하다. 이 순간 "동양의 불교화", "서양의 브랜드"라는 구별의 구조는 의미가 없어진다. "번역"이 이루어지면 그것은 서로 다른 문화를 가진 타인이 모두 이해할 수 있는 "무차별의 보편성"을 지니게 된다.
전적으로 동양적인 것이라면 동양인만이 이해할 수 있고, 전적적으로 서양적인 것이라면 서양인 이외에는 이해를 할 수가 없다. 오로지 "번역"을 통한 보편개념으로의 확장이 있어야 타자와의 공통성이 생겨 대화가 가능하게 된다. 지민석 작가의 그림은 단순히 동양인들만이 느낄 수 있는 영역을 넘어 서양인들도 자기의 브랜드가 동양화에 자연스럽게 스며든 것을 보며 감탄의 웃음을 자아낼 수 있는 "번역"의 작품이다. 이러한 "번역"의 작품들로 이루어진 전시장은 어느 구체적인 신의 이름에 집착하는 특정인의 점령지가 아니라 본래 인간이 신적인 존재와 인생을 즐긴다는 보편성에 입각해 모두와 즐길 수 있는 축제의 장소로 변화할 것이다.
전창재
한국의 세 거울 Three Mirrors from Korea
이세현_장재록_지민석展
멕시코 국립 문화 박물관
2018_0705 ▶ 2018_0909 /
지민석 작가는 불화를 레퍼런스로 사용하는 화가이다. 동양 문화는 무속으로 시작했다. 무속은 하늘이 인간에게 내린 명령과 메시지를 받아서 인간들에게 해석해주는 무리였다. 동양 문화의 근간에 무속이 있다. 왜냐하면 동양의 종교적 심성은 무속으로부터 출발했기 때문이다. 한국은 중국과 마찬가지로 무속에서 인문주의적 예교(禮敎) 문화로 발전했다. 유교가 그것인데 유교는 통치와 질서를 잡는데 매우 적절한 가르침을 전파했다. 따라서 유교는 통치자들에게 인문적 가르침을 넘어서 교조화되기도 했다. 통치자와 반대로 민중과 여성들은 현실을 뛰어넘는 초월적 힘이 필요했는데 바로 불교에서 찾았다. 화엄 불교는 우주를 사법계(事法界) · 이법계(理法界) · 이사무애법계(理事無礙法界) · 사사무애법계(事事無礙法界)로 나누어서 본다. 사법계는 모든 것이 차별되는 현상을 가리킨다. 이법계는 모든 현상의 본체는 동일하다는 뜻이다. 이사무애법계는 본체와 현상은 둘이 아니라 하나이며 서로 의존하고 있기에 모든 존재는 평등 속에서 차별을 보이고 차별 속에서 평등을 보인다는 뜻이다. 사사무애법계는 모든 현상은 서로가 서로를 받아들이고 비추면서 융합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사법계 속에서 괴로워하며 산다. 그러다가 이법계를 추구하게 되며 결국 알게 된다. 그러나 본체는 현상 속에 원만구족(圓滿具足)하게 있으며 존재하는 모든 것은 서로가 서로를 떠받치며 서로를 도우면서 존재한다는 것을 알아야 우리는 비로소 진리에 접근한다. 지민석 작가의 현대적으로 변용시킨 불화는 우리의 참모습에 접근하려는 의지에 다름 아니다. 그 진리는 내면적 초월이다.
이진명(독립비평가)
